대만(Taiwan)여행 정보: #7 중정기념당(中正紀念堂)












1975년, 대만의 장제스 총통이 사망한 후 계획을 거쳐 1980년 완공한 중정기념당 입니다.


대만에서도 엄청난 규모를 자랑하며, 건물 전체가 대리석으로 덮여있어 습도가 높아 건물 외벽에 이끼가 발생해 검어지는 대만 건축물들에 비해


내구성이 매우 좋은 건축물 중 하나 입니다.


중정(中正)은 장개석(장제스)의 본명입니다. 


또한, 국민당과 민주진보당 양 당의 입장차이로 인해 꽤 수모를 겪는 곳이기도 합니다.



아시아보다 수백년 넘게 민주주의를 유지하는 미국에서도 국부에 대해서는 아무리 잘못된 점이 있더라도 그의 공로를 인정하거나,


영국에서도 왕권의 권위를 존중하는 부분들을 고려한다면


아시아계열 민주주의는 너무 극단주의가 많지 않나 생각이 듭니다.



여하튼, 국민당 입장에서는 국부를 위한 약소한 선물과도 같은 곳이지만,


장제스 자체를 부정하는 (실제 장제스가 죽을 때까지 총통을 하여 박정희 대통령과 같이 독재자라고 표현합니다.) 민주진보당 입장에서는


눈엣가시 같은 곳이라 정권을 잡을 때마다 이 곳을 호시탐탐 노리고 있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런 민주진보당이 지지하는 사람이 장제스의 아들이자 중화민국의 2대 총통인 장징궈.






저는 중전기념당 왼편의 대충문을 통해 들어갔습니다.






건물 내부에 대형 미니어쳐가 전체 모습을 보여줍니다.


원래 중정기념당 앞에 건축물이 전혀 없었고, 정문까지 모두 중정기념당이었으나,


앞서 말한 첫 민주진보당 집권시기에 이 중정기념당을 밀어버리려는 시도를 하게됩니다.


현재의 중정기념당 부지 앞의 광장은 국가소유였기에 '자유광장'으로 변경하고 양 옆에 음악당을 세웠습니다.


왼쪽이 고전음악당, 오른쪽이 현대음악당으로 운영됩니다.


또한, 중정기념당 자체도 밀어버리려고 시도하였으나,


중정기념당은 당시 국가의 자금으로 설립한 것이 아니라, 전 세계의 수백만명의 화교가 낸 기부금으로 건설되어서


이들의 해체 허가를 전부 받아야 해체가 가능했기 때문에 민주진보당은 중정기념당 해체를 포기합니다.





사설이지만 이런 부분도 상당한 뻘짓이라고 생각합니다.


오로지 민주주의라는 이름 하에 역사를 파괴하고 뿌리와 국가의 근간을 지우는게 과연 후대에게 도움이 될지 잘 모르겠습니다.


미국에서도 워싱턴에 대하여 문제제기는 있어도, 국부로써의 대우를 해하는 경우는 없습니다.


왜냐면 이러쿵 저러쿵 해도 결국 미국이란 국가의 기반을 만든 것은 '워싱턴'이었기 때문이죠.


한국도 마찬가지라고 생각됩니다.


수 많은 리더를 거쳐오며 모두의 장 단점이 있었지만


사람들은 오직 단점만을 부각하고, 한명씩 한명씩 지워버린다면


과연 대한민국이란 국가의 정체성이 어디에 있고, 이 나라를 위해 희생하거나 업적을 세우려는 사람이 더 등장할지 의문입니다.


그래서 더더욱 리더가 아니라 생계형 정치인이 늘어나겠지요.



대만 역시 한국과 매우 유사한 고민을 갖고 있습니다.












장제스의 젊은시절 모습과 쑨원의 모습입니다.






이 사진은 한국의 역사 교과서에서는 사라진 사진입니다.


미국의 루즈벨트, 영국의 처칠 그리고 중화민국의 장제스, 송미령(쑹메이링-장제스의 부인)씨의 카이로 회담 사진입니다.


이 날, UN이 처음 설립된 날이었으며, 잘못 알려진 사실과 다르게


중화민국의 주도하에 UN이 설립됩니다.



대부분 사람들이 중국 공산당이 UN을 가입하여 대만이 탈퇴했다고 알고 있거나, 세계 국가들이 대만과의 수교를 끊고 중국 공산당과 수교를 하여


탈퇴했다고 알고 있습니다만,


실제로는 UN 설립 다음 해에 중국 공산당의 공격을 받고 연합국에 도움을 요청했으나, 그들이 거절하여 탈퇴하였습니다.


이후 UN을 탈퇴한 것을 후회한다고 회고록에 기록하기도 하였습니다.





맥아더 장군과 함께 있는 장제스.


이 시기가 바로 한국군이 인천상륙작전을 성공하고, 압록강까지 북한군을 밀어 붙였던 시기입니다.


전세가 안정화 되자 맥아더는 중화민국을 끌여들여 아예 중국 자체를 수복하는 계획을 세우게 됩니다.


실제로 중화민국에서 군을 한국으로 보내었고, 활동한 기록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는 당시 미국 대통령인 트루먼에 의해 저지되었습니다.




그 후에 중국 공산당(중공)은 한국으로 대규모의 병력을 보내는데, 


한국에 잘 알려지지 않은 역사로써, 중국에서 처음 한국 침공에 보낸 약 13만명의 병력이 바로 과거 대만의 국부천대 사건때 


본토에서 대만으로 가지 못했던 중화민국의 군인들이었고, 이들을 총알받이로 내몹니다.


이들은 당연히 한국군과 싸우지 못했습니다. (같은 민주주의 지지자였으므로.)


그래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항복하고 한국군에 포로로 잡혔고,


이들이 수용되었던 곳이 바로 그 유명한 '거제 포로수용소'였습니다.


실제 휴전 후에 대부분의 사람들이 중국공산당으로 돌아가기보다 제3국 또는 대만행을 요청하였고,


다수의 사람들이 대만으로 돌아갔습니다.



대한민국, 박정희 대통령 집권시기에 장제스에게 준 '대한민국 1등 건국 무공 훈장'입니다.


전 세계에 단 세명만이 받은 훈장입니다.


이유는 일제강점기 시기에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세울 수 있도록 도왔던 곳이 바로 '중화민국'이었기 때문입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기념관은 현재 중국 상하이에 있지만, 정신적으로는 대만과 더 가깝습니다.


중화민국에 그 정통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장제스의 집무실. 그에게 타이완은 임시로 머무는 곳이었고, 본토를 수복하기 위해 노력하였습니다.


그렇기에 더더욱 벽에 붙은 큰 중국 지도가 안타깝게 느껴집니다.




미국에서 장제스와 그의 부인 송미령(쏭메이링)씨를 위하여 차량을 선물하였습니다.


두 차량 모두 박물관에 전시중인데, 이 사진은 송미령씨가 타고다니던 차량입니다.




장제스와 송미령(쏭메이링)




장제스의 유품




장제스가 입고다니던 옷





기념당 3층에 올라가면 거대한 장제스 상이 있습니다.


이 상은 중화민국 총통부(한국의 청와대)를 향해 건설되어, 중화민국을 지켜보고 있는 의미로 지어졌습니다.


또한 더 나아가 중국 본토를 향하고 있습니다.


















이상 중정기념당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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